05

 

가자.”

노신사가 벤츠 S클래스에 탄다. 그 뒤를 중년 남자와 청년 남자가 따른다. 셋 다 고급 블랙 수트를 갖춰 입었다. 청년은 조수석, 중년은 노신사의 옆에 탄다. 노인이 손짓하자 운전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핸들을 부드럽게 돌린다. 노인은 얼굴과 손만 노인일 뿐 눈빛도 자세도 늙은 티가 나지 않았다. 노인은 꼿꼿한 자세로 앞을 바라보며 중년에게 말했다.

날씨 세팅 해 놓았나.”

헬기 뜰 수 있게 해놨습니다.”

그대로 조수석에 앉은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준비 다 해서 왔나.”
청년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

가지.”

벤츠가 도착한 곳은 김포의 비행장. 그들만을 위해 헬기가 준비되어 있다. 모든 스텝들이 스탠바이. 남자 셋을 태우기 위해서 조종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노인이 벤츠에서 내리자 조종사가 다가와 인사한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만져주었다. 조종사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다. 운전사가 그들의 리모와 트렁크들을 헬기 스텝에게 넘긴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간다. 타타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타. 청년은 돌아가는 프로펠러를 바라본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헬기에 올라탔다.

노인과 중년은 바쁜 이들이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써야 했다. 헬기를 탄 이유도 제일 빠르기 때문이었다. 1시간 반. 아무리 서울에서 제일 직선으로 도로가 난 거제도라 해도 차를 타면 4시간이 넘게 걸렸다. 노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헤드폰을 쓴 채로 눈을 감아버렸다. 아마 모자란 잠을 조금이나마 보충하려는 뜻일 거다. 중년은 조종사에게 이것저것 묻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 남자는 서로에게 말이 없다. 헬기를 채우는 건 프로펠러가 다다다다 돌아가는 소리와, 조종사가 무전을 치는 소리 뿐. 청년은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중년이 세팅해놓은 파란 하늘. 세 남자가 함께 움직이는 날은 무조건 쾌청하다. 노인은 온도를, 중년은 기상을 조정했으니까. 물리적 마법사인 둘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권능을 실현한다. 보이는 세계에서 마력을 사용하는 이들은 금방 인정받고 권력도 쥐었다. 성준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작용하는 마력을 받았기에 인정받기도 권력을 쥐기도 어려웠다.

보이지 않는 세계.

성준은 앞을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거렸다. . 저거. 시야에 검은 물체가 나타난다. 성준은 눈을 크게 떴다. 예전에 만났던 존재다. 펄럭. 그가 다가온다. 성준은 그를 알았다. 자신에게 마력을 주었던 남자. 검은 옷, 머리, 눈동자의 남자. 그가 천천히 허공을 걸어 다가온다. 헬기를 타고 있는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냐는 물음은 무의미하다. 그런 존재니까. 성준은 나이 먹은 후에 그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 노력했다. 외국에 나갈 일이 있으면 무조건 도서관으로 가서 문헌을 뒤졌다.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어딜 가나 한 번 씩 물었다. 혹 새로운 존재를 만나면 남자에 대해서 물었다. 아무도 몰랐다. 그런 존재였다.

남자가 다가오며 웃는다.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안녕.”

자신에게만 보일 거다. 조종사도 중년도 노년도 반응이 없다. 오로지 물리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 다른 세계와 힘은 자신만 안다.

오랜만이네.”

성준은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힘에 취해 살아왔지만 힘의 근원이 어딘지는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계속 알고 있다 보니 미쳐버릴 지경이었지만.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걸 기억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미친 듯 휘두를 수 있었지만. 저 남자가 나타났다는 건.

약속 기억하고 있지?”

이거다. 성준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낀다. 온 세상의 문헌을 뒤지고 사람과 존재들에게 이 남자를 물었던 이유. 존재를 알아야 이 약속의 대가를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성준은 알아내지 못했고 빌린 힘을 휘두르며 살아왔다.

어린 너에게는 받아갈 게 없었지. 그런데 이제 많이 컸잖아?”

남자가 웃는다. 온화한 얼굴이다. 보는 사람은 공포에 떨고 있지만.

이제부터 서서히 받아가려고 하는데 말이야.”

. 남자가 손가락을 맞부딪혀 소리를 낸다.

시작해 보자.”

그 순간 프로펠러와 본체를 연결하는 부분이 분리된다. ! 노인은 바로 눈을 크게 떴고 중년은 안전벨트를 한 채로 일어났다. 성준은 남자가 사라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은 소리를 질렀다.

뭐야!”

조종사는 당황해서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긴급 무전을 치며 소리를 지른다.

모르겠습니다! 출발 전에는 무사했는데!”

그 말에 중년은 성준을 바라보았다.

뭐 보이는 거 있나!”

성준은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었다. ! 조종사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노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성준은 발판에 발을 올리고 프로펠러를 바라본다.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게 보인다. 빨간 뱀이다. 뱀이 혓바닥을 낼름거린다.

.”

손을 들었다. 뱀이라. 마력량이 많지 않다. 그냥 날려버리면 된다. 성준이 속으로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 뱀이 그 색을 바꾼다. 검은색으로. 번들번들한 비늘이 검은색으로 물든다. 성준은 그 순간에 눈을 크게 떴다. 히익. 마력량이 갑자기 솟구친다. 숨이 막힌다. 성준이 숨을 쉬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왜 이런 게 여기 있어. 지옥의 마왕같은 게, 지금 자신 앞에 있다. 평범한 괴물인 줄 알았는데, 지옥의 왕이 현현해서 자신을 노려본다.

- 힘을 받았다고 해서.

성준의 목을 조른다. 끄으으으윽. 성준은 뱀을 떼어내려 하나 불가능하다. 비늘에도 살을 녹이고 마력을 빼앗는 독이 깃들여있다. 으으으으윽. 흐으으으윽. 으윽. 성준은 몸부림칠 수도 없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뱀에게 흔들린다.

- 뭐 대단한 놈인 줄 알았더니.

히익. 성준은 숨을 들이쉬었다. 히익. . 히익. 으윽. 숨 쉬는 것도 고작이다. 으으으으으윽. 뱀은 웃는다. 그리고는, 다시 검은 옷의 남자가 된다.

거제도에서 만나자.”

남자는 그대로, 하성준을 헬기에서 떨어트렸다.

 

준식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왕진가방을 챙겼다. 성준이 헬기를 타고 거제도에 가던 길에 갑자기 추락했다고 했다.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타고 있었으니까 땅에 닿기도 전에 주워올리긴 한 모양이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그의 가족들은 기절한 하성준을 그대로 헬기에 싣고 거제도로 향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니었다. 원래 그런 놈들이었으니까. 하성준은 온 몸에 검푸른 멍이 점점이 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혼수상태에 들어갔다.

그의 잔인한 가족들은 거제도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병원 중환자실에 넣어두고 준식을 호출했다. 자신을 부르는 게 당연했다. 자신이 성준의 주치의의자, 현존하는 마법전문의사들 중 제일 뛰어났으니까. 준식은 가방을 챙겨 현관문 앞에 섰다. 그리고 한참을 벌벌 떨었다. 어떻게 가야 빠를까. 어떻게 해야 좀 더 빨리 갈까. 이대로 나 운전할 수 있나?

준식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현관문 옆에 있는 바구니에서 차키를 꺼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심호흡한다. 서울에서 거제도까지 최대로 밟으면 4시간이면 갈 수 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자신은 의사니까. 빠르게 달려가서 봐야 한다. 그리고.

하성준이니까.

준식은 한손에는 가방과 차키를 들고 문을 열었다. 온몸에 떨림이 사라졌다. 얼른 가야 한다. 하성준에게로.

 

Posted by 이반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