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식은 일을 그만두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더 이상 공무원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만두는 건 쉽지 않았다. 우선 그만두겠다고 한 후에 몇 번이고 상급자들과 면담을 해야 했다. 면담 후에도 고집을 꺾지 않아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야 했고. 우리나라에 몇 없는 마법사 전문의. 그것도 공무원. 거의 유일한 존재였기에 그만두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아무리 놓치기 싫은 인력이라 해도 이런 일에서 제일 위에 있는 건 본인의 의지. 결국 준식은 모든 걸 두고 나올 수 있었다. 한 여섯 달 쯤 걸렸다.

그만두겠다고 이야기를 꺼내고 준비를 시작한 건 분명 두꺼운 패딩 점퍼를 벗지 못했던 늦겨울이었는데, 다 정리하고 자유의 몸이 되니 이제 다시 패딩을 슬슬 꺼내야 할 때가 되었다. 준식은 속으로 욕을 삼키면서 더 바쁘게 일했다.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사실 학교로 돌아가 포기한 학위를 다시 받고 싶다는 생각은 의사 면허를 받으면서 없어졌다. 의사 면허를 받고 나서 꿈이라고 해야 하나, 소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생겼다.

- 이제 의사니까, 개원해야지.

의사니까 자기 병원을 차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왜 마법사 전문의가 되었는지는 잊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 쫓아다니면서 치료해주려고 그런 거였지. 곧 국가 소속 전문의가 되기 위한 전형도 치러야 하고, 그 전형에 통과하면 아마 오래도록 자신은 국가에 매여 노예처럼 부려질 터였다.

- 하지만 뭐, 언젠가는 은퇴할테고.

준식은 뭐든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언젠가는 전부 사라진다. 지금 자신이 염원하는 남자도, 그리고 그렇게 만든 그 마음도 사랑도. 사라진다. 전부. .

- 지금은 그 끝을 모르겠지만.

지금 같아선 끝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껏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몸이 따라가니 끝이 어딘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끔, 공부도 일도 전부 없고 겨우 틈이 생겨날 때. 몸도 마음도 아주 가끔 한가할 때. 미래를 생각해보게 되는 멍한 시간에. 그때 준식은 자신이 은퇴한 후에 시간을 그려보았다.

- 주택에 병원을 차리는 거지.

국가 소속 마법사 전문의로 일하다가 퇴직하고 나오면, 어차피 응급환자는 없을 테고 환자는 어떻게든 찾아오게 된다. 이동에 제약이 없는 이들이 자기 환자들이니까. 준식은 깍쟁이같은 얼굴에, 사상을 가졌으면서 취향은 호젓하고 시골스러웠다. 조용한 게 좋았다. 그리고 커피를 좋아했다. 대학원에 다닐 당시에 가지게 된 취미였다. 인생의 모든 시간을 공부에 때려붓던 시절, 잠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탐닉했던 커피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렸다.

- 커피도 개원도 함께 할 방법이 없나.

가끔 머리도 손도 빌 때가 있다. 그럴 땐 빌어먹을 하성준을 생각했다. 게이면서 왜 자꾸 아닌 척 하고 결혼해서 정치인 하려고 해. 왜 자꾸 줄 빌려줄 데도 아닌 데 가서 줄 대려고 해. 몇 번이나 욕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자동문이 열린다. 준식은 싱크대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 하성준놈. 그놈이 왔다. 준식은 고개를 젓고 행주를 걸이에 걸고서 카운터에 섰다. 성준은 보기보다 입맛이 까다로웠다. 도련님이었으니까. 생긴 건 맨날 국밥에 찌개, 삼겹살에 소주만 퍼먹게 생겨서는 아니 실제로도 좀 그러면서 커피 맛은 이상하게도 따져댔다. 하도 잔소리를 해서 성준에게만 따로 먹이는 핸드드립 블랜딩을 따로 만들어뒀을 정도였다.

.”

번듯하고 멀쑥하게 수트를 차려 입고 서서는 말을 건다. 준식은 훅 째려보았다. , 가 뭐냐. 이 새끼가. 보자마자 안 고운 말부터 썼다가는 오늘도 서로 끝이 없으리란 걸 안다. 그래서 자기는 말을 곱게 하기로 했다.

. 왔냐. 뭐 마실래. 밥은 먹었어?”

한국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정다운 인사를 건넨다. 어제도 하루 종일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그래도 우선 씹어 삼키고 말을 한다. 오늘은 우선 그러기로 한다.

. 밥 먹었고. 나 그냥 커피 한 잔 줘.”

이놈의 커피는 자신이 만든 핸드드립 블랜드. 온도는 83도로. 준식은 한숨을 작게 쉬고 물을 준비하고 드리퍼를 꺼내 온다. 제일 정성스레 만드는 하성준 블랜드를 찾아온다. 바로 핸드밀로 갈아서 원두를 준비한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기분이다. 성준은 그 양을 바라보다가 창가 어느 구석에 가서 등을 기대고 앉는다. 그러고는 다리를 쭉 뻗고 다른 다리를 무릎 위에 올리고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보기 시작한다.

준식은 개원도 카페도 같이 하기로 했다. 전쟁 이전에도 많던 기관들이었다. 휴게음식점과 의료기관을 함께 겸하려니 얼마나 일이 복잡하던지 머리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구상부터 시작해 전부 난관이었다. 주택가가 많은 어느 부촌 한 군데에 집을 샀다. 공무원 관두고 개원과 개업에만 매달렸다. 집을 개조하고, 로스팅 기계를 들이고,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이고, 의료기구와 용구를 사고, 간호사를 구인하고, 카페 바리스타를 끌어오고. 원두들을 로스팅하고, 하성준 핸드드립 블렌드를 만들고.

네 감은 눈 위에 꽃잎이 내려앉으면

네 눈 속에 꽃이 피어난다.

 

좀 정리되자 준식은 바로 꽃시장으로 달려가 꽃과 나무들을 사왔다. 카페이자 병원인 곳에는 꽃이 있어야 했다. 마법사들은 예민한 종자들이라, 식물과 동물에 관대하다. 그것들을 보고 마음의 안식과 위안을 얻는다. 전혀 안 그래 보이는 하성준조차 나무에 말을 걸고, 새를 사랑하며 그들과 일한다.

마당에 성준을 위한 모란과 붓꽃, 수국과 소나무, 생각보다 자주 찾아오는 강해준과 그 마누라, 그 딸을 위해서 은행나무와 산수유를 심었다. 여름에 너무 파랗기만 하기에 배롱나무도 심고, 날카로운 맛이 하나도 없기에 상사화도 심었다. 덕분에 사시사철 알록달록했다. 창밖을 보면 내내 하얗고 파랗고 노랗고. 준식은 매일같이 찾아올 성준의 눈을 위해서 최대한 화려하게 마당을 꾸몄다.

네 감은 눈 위에 햇살이 내리면

네 눈 속에 단풍나무 푸른 잎사귀들이 살랑거린다.

꽃무덤을 보고 자는 척 고요히 꽃과 대화하는 너를 위해서. 내가 일하느라 바쁠 때 심심하지 말라고, 내 시간을 들여 정원을 꾸몄다. 내 병원에 치료받으러 와서 목마르거나 배고프지 말라고 카페를 차렸다.

 

네 감은 눈 위에 나비가 앉으면

네 눈동자는 환하게 빛나고 있을까.

 

그걸 네가 지금 좋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너에게 있어 끝까지 약자일 예정이기에 너를 위해 많은 걸 준비했다. 드리퍼에 담은 원두 위로 조심히 물을 흘려넣는다. 원두가 조금씩 부풀어오르며 드리퍼 밑의 서버로 검은 물을 쏟아낸다. 향긋한 커피향이 온 홀에 퍼져나간다. 준식은 커피를 다 내려 제일 좋은 잔과 서버에 담아내고 성준을 바라본다. 어느새 눈을 감고 배에 두 손을 얹고 앉아 있다.

 

먼 항해에서 돌아온 배의 노처럼

네 긴 속눈썹은 가지런히 쉬고 있다.

가끔씩 배가 출렁이는지

넌 가끔 두 주먹을 꼭 쥐기도 한다.

 

준식은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눈밑이 푹 꺼져 있다. 약간 부은 것 같기도 하다. 어제도 술 마셨나. 성준은 바빴다. 일련의 사건 이후 성준은 커밍아웃하고 당적을 옮겼다. 좌파 계열 당에서 받아준 게 다행이었다. 남자가 좋다는 것 이외에는 온전히 극우의 자랑스런 아들로 모든 스펙을 가지고 있던 젊은 남자 마법사 정치인을 버리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 이후 성준의 인생은 당적만 바뀌었을 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활동에 불려 다니고, 1급 마법사로서 소화해야 하는 일들을 하고. 가끔 해외로 출장을 나가고. 아주 가끔 다쳐서 와서는 자신이 죽어라 욕을 하며 치료해주고.

그가 커밍아웃하면서도 준식 자신은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는 사람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알 만한 사람은 알지만 굳이 누구도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관계. 준식은 처음에는 자신이 그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아 서운했다. 그러나 성준이 다시 극우당에 소속되어 있을 때처럼 다니는 걸 보고 그 마음을 바로 접었다. 귀찮은 건 질색이었고, 자신의 고객들은 조용한 걸 좋아했으니까. 자신조차. 그 서운한 마음조차 지나가자 자신은 당연하게, , 하성준 걱정을 했다. 너무 일이 많았으니까.

 

네 감은 눈 속에 눈이 내리면

나는 새하얀 자작나무숲을 한없이 헤매고 있을 거야.

지친 발걸음이 네 눈동자 위에 찍힌다.

 

성준이 눈을 떴다. 둘이 눈이 마주치자 준식은 그 앞에 쿠키 하나와 방금 내린 커피를 내려놓는다. 성준은 기지개를 켜며 길게 하품을 하고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천천히 마신다. 산적같은 얼굴과 몸에 어울리지 않는 기품과 자세, 예의. 이 역시 성준을 이루는 한 부분이었다. 극우의 자랑스런 아들이었다가, 좌파의 선구자가 된 남자. 반대의 영역으로 넘어와도 맨 앞으로 앞서나가는 남자.

어제도 술 마셨냐.”

.”

그런 놈이 또 커피를 처 마시냐.”

이걸 먹어야 해장이 되더라고.”

작작 드세요.”

니가 커피를 내리는데 내가 작작 마실 수가 있을 리가.”

.”

오늘은 뭔가 다르다. 말이 이상해. 이런 말 안 하는 놈인데. 준식은 고개를 갸웃한다. 이 자식 뭔가 잘못 먹었나. 성준은 다시 눈을 감고 한숨을 쉰다.

 

성준식.”

.”

결혼하자.”

 

네가 눈을 뜨면 내 눈은 까맣게 감기고 말 거야.

 

어느새 성준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 남은 한 손으로 반지를 꺼낸다. 케이스도 없어. 그냥 누런 순금 반지. 딱 보기만 해도 알겠다. 그냥 24K 민짜 반지구만. 아무 것도 없이, 그냥. 네모난 반지다.

아무것도 없는 거 같지. 아니야.”

반지 안을 보여준다.

네 이름이랑 내 이름을 새겼어.”

. 준식은 기가 막혀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없을 진지한 얼굴이다.

그리고 이거 디올 파인 주얼리 오더 메이드야. 받아주는 브랜드가 없어서 부띠끄 몇 개를 돌았는 줄 아냐. 매니저가 웃음을 겨우 참으면서 받아주더라.”

나라도 웃겼겠다.

아직 뭐, 입법은 안 되었고. 강해준처럼 초법적 수단을 써서 널 가족관계증명서 안에 처넣을 순 없겠지만.”

성준이 준식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그 무식하게 생긴 반지를 끼운다. 싯누런색에 광택만 있지, 그냥 네모각진 민짜 순금 반지. 이게 무슨 디올 파인 주얼리 커스텀 메이드라는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결혼해. 결혼반지야.”

준식은 홀린 듯이 그 반지를 바라본다. 아니 이건 무슨 일. 이건 무슨 반지.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디올 파인 주얼리라고. 아니 이게 뭐. 아니. 아니.

사랑한다.”

그 말에 고개를 숙인 건 성준이 아니라 준식이었다. 성준이 극우정당을 버리고 좌파로 이적하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던 자신의 말. 넌 왜 나한테 결혼하자고 안 하냐. 이 시발새끼야. 그 비슷한 말이었던 거 같다. 하여간. 그 말이 돌고 돌아, 맨 마지막에는.

평생 같이 있어 봅시다.”

 

나는 너를 채우고 너는 내게서 빠져나간다.

우리는 번지면서 점점 뚜렷해진다.

 

* 신철규 - 데칼코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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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가자.”

노신사가 벤츠 S클래스에 탄다. 그 뒤를 중년 남자와 청년 남자가 따른다. 셋 다 고급 블랙 수트를 갖춰 입었다. 청년은 조수석, 중년은 노신사의 옆에 탄다. 노인이 손짓하자 운전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핸들을 부드럽게 돌린다. 노인은 얼굴과 손만 노인일 뿐 눈빛도 자세도 늙은 티가 나지 않았다. 노인은 꼿꼿한 자세로 앞을 바라보며 중년에게 말했다.

날씨 세팅 해 놓았나.”

헬기 뜰 수 있게 해놨습니다.”

그대로 조수석에 앉은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준비 다 해서 왔나.”
청년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

가지.”

벤츠가 도착한 곳은 김포의 비행장. 그들만을 위해 헬기가 준비되어 있다. 모든 스텝들이 스탠바이. 남자 셋을 태우기 위해서 조종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노인이 벤츠에서 내리자 조종사가 다가와 인사한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만져주었다. 조종사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인사한다. 운전사가 그들의 리모와 트렁크들을 헬기 스텝에게 넘긴다. 헬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간다. 타타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타. 청년은 돌아가는 프로펠러를 바라본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헬기에 올라탔다.

노인과 중년은 바쁜 이들이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써야 했다. 헬기를 탄 이유도 제일 빠르기 때문이었다. 1시간 반. 아무리 서울에서 제일 직선으로 도로가 난 거제도라 해도 차를 타면 4시간이 넘게 걸렸다. 노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헤드폰을 쓴 채로 눈을 감아버렸다. 아마 모자란 잠을 조금이나마 보충하려는 뜻일 거다. 중년은 조종사에게 이것저것 묻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 남자는 서로에게 말이 없다. 헬기를 채우는 건 프로펠러가 다다다다 돌아가는 소리와, 조종사가 무전을 치는 소리 뿐. 청년은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중년이 세팅해놓은 파란 하늘. 세 남자가 함께 움직이는 날은 무조건 쾌청하다. 노인은 온도를, 중년은 기상을 조정했으니까. 물리적 마법사인 둘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권능을 실현한다. 보이는 세계에서 마력을 사용하는 이들은 금방 인정받고 권력도 쥐었다. 성준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작용하는 마력을 받았기에 인정받기도 권력을 쥐기도 어려웠다.

보이지 않는 세계.

성준은 앞을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거렸다. . 저거. 시야에 검은 물체가 나타난다. 성준은 눈을 크게 떴다. 예전에 만났던 존재다. 펄럭. 그가 다가온다. 성준은 그를 알았다. 자신에게 마력을 주었던 남자. 검은 옷, 머리, 눈동자의 남자. 그가 천천히 허공을 걸어 다가온다. 헬기를 타고 있는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냐는 물음은 무의미하다. 그런 존재니까. 성준은 나이 먹은 후에 그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 노력했다. 외국에 나갈 일이 있으면 무조건 도서관으로 가서 문헌을 뒤졌다.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어딜 가나 한 번 씩 물었다. 혹 새로운 존재를 만나면 남자에 대해서 물었다. 아무도 몰랐다. 그런 존재였다.

남자가 다가오며 웃는다.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안녕.”

자신에게만 보일 거다. 조종사도 중년도 노년도 반응이 없다. 오로지 물리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 다른 세계와 힘은 자신만 안다.

오랜만이네.”

성준은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힘에 취해 살아왔지만 힘의 근원이 어딘지는 잊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계속 알고 있다 보니 미쳐버릴 지경이었지만.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걸 기억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미친 듯 휘두를 수 있었지만. 저 남자가 나타났다는 건.

약속 기억하고 있지?”

이거다. 성준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낀다. 온 세상의 문헌을 뒤지고 사람과 존재들에게 이 남자를 물었던 이유. 존재를 알아야 이 약속의 대가를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성준은 알아내지 못했고 빌린 힘을 휘두르며 살아왔다.

어린 너에게는 받아갈 게 없었지. 그런데 이제 많이 컸잖아?”

남자가 웃는다. 온화한 얼굴이다. 보는 사람은 공포에 떨고 있지만.

이제부터 서서히 받아가려고 하는데 말이야.”

. 남자가 손가락을 맞부딪혀 소리를 낸다.

시작해 보자.”

그 순간 프로펠러와 본체를 연결하는 부분이 분리된다. ! 노인은 바로 눈을 크게 떴고 중년은 안전벨트를 한 채로 일어났다. 성준은 남자가 사라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은 소리를 질렀다.

뭐야!”

조종사는 당황해서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긴급 무전을 치며 소리를 지른다.

모르겠습니다! 출발 전에는 무사했는데!”

그 말에 중년은 성준을 바라보았다.

뭐 보이는 거 있나!”

성준은 안전벨트를 풀고 문을 열었다. ! 조종사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노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성준은 발판에 발을 올리고 프로펠러를 바라본다.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게 보인다. 빨간 뱀이다. 뱀이 혓바닥을 낼름거린다.

.”

손을 들었다. 뱀이라. 마력량이 많지 않다. 그냥 날려버리면 된다. 성준이 속으로 주문을 외기 시작하자, 뱀이 그 색을 바꾼다. 검은색으로. 번들번들한 비늘이 검은색으로 물든다. 성준은 그 순간에 눈을 크게 떴다. 히익. 마력량이 갑자기 솟구친다. 숨이 막힌다. 성준이 숨을 쉬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왜 이런 게 여기 있어. 지옥의 마왕같은 게, 지금 자신 앞에 있다. 평범한 괴물인 줄 알았는데, 지옥의 왕이 현현해서 자신을 노려본다.

- 힘을 받았다고 해서.

성준의 목을 조른다. 끄으으으윽. 성준은 뱀을 떼어내려 하나 불가능하다. 비늘에도 살을 녹이고 마력을 빼앗는 독이 깃들여있다. 으으으으윽. 흐으으으윽. 으윽. 성준은 몸부림칠 수도 없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뱀에게 흔들린다.

- 뭐 대단한 놈인 줄 알았더니.

히익. 성준은 숨을 들이쉬었다. 히익. . 히익. 으윽. 숨 쉬는 것도 고작이다. 으으으으으윽. 뱀은 웃는다. 그리고는, 다시 검은 옷의 남자가 된다.

거제도에서 만나자.”

남자는 그대로, 하성준을 헬기에서 떨어트렸다.

 

준식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왕진가방을 챙겼다. 성준이 헬기를 타고 거제도에 가던 길에 갑자기 추락했다고 했다.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타고 있었으니까 땅에 닿기도 전에 주워올리긴 한 모양이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그의 가족들은 기절한 하성준을 그대로 헬기에 싣고 거제도로 향했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니었다. 원래 그런 놈들이었으니까. 하성준은 온 몸에 검푸른 멍이 점점이 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혼수상태에 들어갔다.

그의 잔인한 가족들은 거제도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병원 중환자실에 넣어두고 준식을 호출했다. 자신을 부르는 게 당연했다. 자신이 성준의 주치의의자, 현존하는 마법전문의사들 중 제일 뛰어났으니까. 준식은 가방을 챙겨 현관문 앞에 섰다. 그리고 한참을 벌벌 떨었다. 어떻게 가야 빠를까. 어떻게 해야 좀 더 빨리 갈까. 이대로 나 운전할 수 있나?

준식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현관문 옆에 있는 바구니에서 차키를 꺼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심호흡한다. 서울에서 거제도까지 최대로 밟으면 4시간이면 갈 수 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자신은 의사니까. 빠르게 달려가서 봐야 한다. 그리고.

하성준이니까.

준식은 한손에는 가방과 차키를 들고 문을 열었다. 온몸에 떨림이 사라졌다. 얼른 가야 한다. 하성준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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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사실 하성준은 강해준 이외 인간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누가 옆에 앉아 있던지 말던지. 어차피 나 알고 있을 거고, 호기심을 보이거나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셋 중 하나다. 나에 대해서 진짜 알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지독히 오만한 생각이었으나 슬프게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마법대학에 들어온 이후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비슷한 처지의 김동식, 강해준과 함께 다녔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놈들이랑 맨날 술 마시기는 싫었다. 술을 쳐 마시게 된 계기가 그놈의 강해준 때문인데 뭔 강해준을 보면서 술을 마셔야 하는가. 그렇다고 혼자 마시자니 그건 또 싫고.

그래서 온갖 핑계를 다 삼아 술자리를 쫓아 다녔다. 일관성은 없었다. 그냥 아무데나 쫓아가서 앉아있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술만 퍼먹고 안주 축내면 또 안 불러줄 거 같아서 적당히 분위기 맞추고 웃고 놀았다. 인맥을 늘리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가볍게 웃고 친해지고 하는 사이에, 어느 술자리에서도 자기 옆에 앉아있던 사람이 바로 그 빌어먹을 성준식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아주 뻔한 수인데. 하성준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온갖 생각이 휘몰아치는 밤. 우리 빌어먹을 성준식이. 그렇잖아. 신입생 때, 보고 반한 상대를 쫓아다니기 위해서 온갖 술자리에 스며드는 거. 용기는 안 나고, 낮에는 멀리서 지켜보다가 밤에 술자리에서는 옆에 다가와 슬며시 앉는 거. 아무 생각 없이 같이 밥 먹자 술 먹자 어 같은 반이네 우리 수업 같이 듣자 해서 어영부영 자신 패거리에 끼이게 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법대학 수석으로 입학한 성준식은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던 중이었다. 잘 된 일이었다. 차라리. 이미 마법사가 되어 입학한 자신, 강해준, 김동식과 같이 다니게 된 게.

그랬지. 성준은 피식 웃었다. 지금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 빌어먹을 성준식이 자기 애인이 되고, 제일 꿍꿍이를 알 수 없던 김동식은 정의로운 공무원이 되고. 강해준은 남자와 혼인신고를 하고 애까지 입양하고. 성준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돌아누웠다. 사실 준식과 냉전 중이었다. 말이 안 되는 걸로 화를 냈다. 정말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는데. 준식에게는 그게 너무도 중요한 거 같았다.

왜 넌 나한테 결혼하자고 안 하는 거냐?”

화난 얼굴로 멱살을 잡고 이야기한다. 성준은 준식의 그 표정과 말에 벙쪘다. 아니 지금 뭐라는 거야. 우리나라에서 남자끼리 어떻게 결혼을 하냐.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성준식이 기가 막히다는 듯 웃는다.

이 새끼.”

성준은 재빨리 멱살을 풀고 두 걸음 물러서서 결계를 쳤다. 준식은 3급 마법사라 마력은 적지만 잘못 건드리면 귀찮아진다. 마법사 전문 의사니까. 준식은 성준이 결계를 치고 있는 걸 인상을 쓰고 바라보았다. 이 시발놈의 새끼가 진짜. 이를 악물고 입술만 움직여서 말한다. 입은 열리지 않는다. 짓씹는 듯이 내뱉는 말. 성준은 준식이 저렇게 말하는 게 제일 싫었다. 저렇게 이야기하면 그 곱상한 얼굴이 양아치 얼굴이 된다.

, 이 글러먹은 새끼야. 그 날라리 강해준 새끼도 지 애인이랑 애인이 데리고 온 애새끼 지키겠다고 꾸역꾸역 혼인신고까지 했는데.”

, 또 그 이야기냐. 성준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강해준이 그 미친 짓을 해 놓은 덕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잊었느냐, 성준식아. 성준은 고개를 저었다. 도리도리. 상급 결계를 쳤다. 무슨 말을 해도 저 바깥에서는 들리지 않도록. 그랬더니 준식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뭘 둘러쳤는지 알겠지. 준식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입술을 바꾸지 않고 그를 응시하며 궁시렁거린다.

강해준이랑 또 비교를 하고 지랄이여.”

그 사이 준식은 소리를 치기 시작한다. 야 이 거지같은 새끼야, 니가 지금 친 거 상급 결계인 거 알아! 너 또 그 안에서 궁시렁거리고 있지! 시발새끼야, 하여간 니 자식이 그러니까 그따위로 사는 거야, ? 이 거지같은 새끼가! 성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그를 응시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가까스로 참는다. 정치판 할저씨들보다 저 인간 하나 비위 맞춰주는 게 더 힘들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결계막으로 마력으로 만든 화살이 다다닥 날아와 꽂힌다. 투둑. 투둑. 성준식이 만들어 뿌리는 화살이었다. 손바닥에서 화살이 튀어나와 호선을 그리며 날아와 결계에 꽂힌다. 물론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되어 사라지지만.

엄청 열받았나보네. 그제야 성준은 준식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3급 마법사인 준식은 마법 자체는 기본 이상은 했지만 잘 쓰지 않았다. 아주 열이 많이 받거나 신변이 위험해질 때나 겨우 발동하는 게 그의 마법이었다. 강해준이나 자신이 마법을 쓰는 만큼 마법이론에 강한 녀석이었으니 이론만 하고 살아왔다. 갑자기 의전원에 가겠다고 했을 때 마법이론전공 교수들이 가지 말라며 바짓가랑이 붙들고 늘어졌던 게 생각났다. 하던 마법이론 석사도 때려치우고 의전원 공부를 했었으니까.

너 이 새끼 하여간 글러먹었어. 나 간다. 시발 새끼. 지 할 말 없으니까 상급 결계 치는 거 봐라. 개새끼.”

성준은 뒤돌아서 가버리는 준식을 잡지 못했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랬지. 학부 시절 성준식이 갑자기 생각났다. 마법이론은 어렵다. 실제 쓰는 사람은 이론으로 만들 의지나 학식이 부족했고, 이론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실전을 알 수가 없었다. 준식은 마력이 강하지 않은데도 의지와 학식을 가지고 실전까지 전부 꿰뚫을 수 있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게 바로 그의 마력이었으니까. 다른 이들의 마력을 이해하는 힘. 그 힘을 말로 풀어내서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려는 의지. 준식은 자신의 힘이 그런 걸 좋아했고, 평생 학자로 상아탑에서 살아가려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의전원에 가겠다고 했다. 갑자기. 교수는 돈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돈 핑계를 대는데 어쩌겠는가.

물론 그건 핑계였다. 자신 때문이었다. 학교에 있으면 자신을 따라다닐 수 없으니까. 곁에 오래 있지 못하니까. 마법사 전담 의사가 되어야 자신을 치료하고 전담한다는 명목으로 옆에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 성준은 그 사정을 너무 늦게야 알았다. 남의 마음을 읽는 동식이 준식이 의사 시험을 통과하고 마법사 전담 의사가 된 후에야 알려 줬으니까. 너 때문이야. 준식이 석사 포기하고 의전원 간 거. 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거였는데. 한국에 마법사가 몇이나 된다고 그게 돈이 더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

성준은 준식이 자신을 힘겹게 따라와 자꾸 옆에 앉아 있으려는 걸 몰랐다. 마법대학 신입생 시절 모든 술자리에 따라와 자기 옆에 앉아있던 성준식. 자신을 치료하며 곁에 따라다니기 위해서 평생 가고자 했던 길을 때려치우고 의전원에 갔던 성준식. 그 성준식이 이제는 자기의 연인이 되어서 결혼하자 말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더라? . 모르겠다. 성준은 눈을 감았다. 회상이 너무 많았다. 생각이 너무 길어. 잠이나 자자. 내일 생각하자. 늦은 밤, 성준은 깊게 잠이 들었다.

 

해가 뜬다. 아침이 왔다. 성준은 머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가야 한다. 준식이 열 받아서 자기를 까던지 말던지 하던 일은 해야 한다. 3차 세계대전 마력전에 대령으로 참전했던 성준은 그 전공을 앞세워 정계에 입문했다. 성준이 원하던 길이었다. 부모와 조부에게 조금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그 외에 없었다. 마력으로는 강해준을 이길 수가 없다. 이미 권세와 금전이 많아, 자기가 어설프게 뛰어나봤자 의미가 없었다. 목표는 우선 국회위원이 되는 데 있었다.

조부와 아버지가 따르던 당에 입당했다. 오래도록 집권해 보수라고 불리는 당이었다. 지지자들은 거의 아버지와 조부 세대의 사람들이었다. 성준은 웃으면서 그들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와 조부를 대한다고 생각하면 쉬운 일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간단했다. 그들이 젊어 살았던 세상. 2차 대전 이후 급성장기로 돌아가는 것.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외벌이를 하며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집을 넓혀가는 것. 저축하고 근검절약하고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삶.

성준은 웃으며 그들을 대했지만 속으로는 괴로웠다. 자신은 여자를 좋아한 적이 없었다. 30대 젊은 마법사이자 대령이었던 자신을 보고 지지자들은 얼른 좋은 여자 만나 결혼해 아이 낳아 살라 권했다. 자신은 그런 미래를 그려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첫사랑은 그 빌어먹을 강해준이었고, 오랜 첫사랑이 끝나자 성준식이 연인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은 골수까지 동성애자였다. 지지자들과 자신을 밀어주겠다 약속했던 위원들은 전부 동성애를 혐오했다. 아니, 남자로 태어났으면 여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지!

전쟁이 끝난 이후 세상은 더욱 양 극으로 쪼개졌다. 한쪽은 더욱 보수화되었고, 한쪽은 더욱 리버럴해졌다. 나이에 따라서, 자기가 살아온 궤적에 따라서 나누어졌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고, 노인과 중년들은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정과 과거의 가치를 중시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가치를 탐닉하기 시작한 거였다. 성준이 바라는 대로 하자면 성준식을 버려야 했다. 그리고 조부나 아버지가 소개해주는 참한 여자 만나 결혼해 아이들 낳고 살아야 했다.

성준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언제나 자기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분투하던 성준식. 자기 마음 하나를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성준식. 빌어먹을 강해준을 찾으러 티베트로 떠났다가 돌아오던 길에 성준은 홧김에 준식에게 진심을 말하기를 요구했다. 갑갑했으니까. 시원해지고 싶었으니까. 그만 정리하고 싶었으니까. 뭐라도 확실하게 만들고 싶었으니까. 어떻게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밤, 사막 어딘가에서 둘은 서로의 손을 잡았다.

생각만 하면 온 몸이 쪼개지는 기분이었다. 인생은 뜻대로 안 된다. 하지만 성준은 분명 자기가 원하는 걸 한길로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 생각해 보면 궤적은 그렇지 않았다. 1급 마법사가 한 번에 되지 못했고, 3차 대전 마력전에서는 강해준만큼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이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 하니 성준식이 지랄을 한다. 어딘가 많이 어긋났다. 뭔가 이상하다.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팔이 많이 길거나 짧은 옷을 입고 있는 느낌. 그것도 양쪽 팔 길이가 완전히 다른. 자기 옷이 아닌데다가 그 옷도 아주 이상하기 짝이 없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

그러나 그 기분으로도 자신은 출근한다. 멀쩡한 얼굴이 되어 사람들을 만나고 일한다. 소속되어 있는 연구기관에 출석해 실험하고, 이론을 만든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제출한다. 퇴근해 보수 세력의 당에 출근한다. 인맥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눈도장을 찍고, 술을 마신다. 전후 복구 계획에 대해 논한다. 최대한 보수적인 방향의 말들을 한다.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주겠다는 제안들을 부드럽게 물리친다. 여자를 사자는 제안도 사양하고 나오면 하루가 끝난다. 오늘이 어제와 다른 점은 성준식의 연락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

성준은 늦은 밤, 술이 취한 채로 담배를 물고 집으로 향한다. 아무도 없는 길이지만 많은 존재들이 자기 옆을 떠도는 길을 걷는다. 연기를 길게 빼어 물며 걷는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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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원래 없던 힘이 생긴 초등학생은 신이 났다. 아무리 눈치가 빠른 애늙은이라고 할지라도 어린이였다. 정통 계열 마법사라는 게 판정되고 난 이후의 하성준은 급격히 기고만장해졌다. 계약이고 자시고 원래 자기가 가진 힘 같았다. 내꺼야! 이제 내거라고!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었으니까. 어머니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채로 갑자기 성준을 데리고 이런저런 모임과 백화점 명품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성준은 어머니가 화려한 옷을 좋아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숨을 그만 쉬었다. 제일 극적으로 변한 건 할아버지였다. 자신이 마력이 없는 줄 알았을 때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예전과 같은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성준은 빠르게 그 상황에 적응했다. 원래 그랬던 양 살기 시작했다. 정통 계열 마법사로 판정되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에 마법교육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아마 할아버지와 부모님들처럼 마법고, 마법대학을 다니다 군대 갔다 와서 마법사 선발 시험을 치르고 국가마법사가 되겠지. 그리고 다음에는 역시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권력을 쥐고 휘두르며 살게 되지 않을까. 갑자기 인생이 명확해졌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던 인생에서, 모든 게 준비되어 말처럼 앞만 보고 달려 나가면 되는 인생이 되었다. 찌질이에서 왕자님이 되어버린 거지.

그래서 성준은 그 인생을 마구 달렸다. 목에 우선 힘이 들어갔다. 빳빳하게. 부모와 조부의 희망이자 자랑이 되어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교육원에 들어간 순간부터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 되었다. 조부와 부모, 고모까지 모든 집안 식구들의 후광이 엄청났던 데다가, 자신도 그 마력이 대단했던 덕분이었다. 물론 그건 강해준이 나타나면서 깨졌지만.

강해준. 강철에 대한 권능을 가진 자. 판정자들이 기겁하고 전 연구원들이 달려 나가 서로 논문 케이스로 삼겠다고 난리를 쳤다는 인간. 자기와 동갑, 남자. 국가마법사들 내에서도 파문이 일었다. 보고된 마력량이 이때까지 알고 있던 마법사들 중에 최상급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부모와 조부도 모여서 그에 대해 말했었다. 그 정도 수치면 대단한 건데. 대단한 정도가 아니에요. 국제마법사협회 기준 최상급 마법사 정도에 속합니다. 강철에 대한 권능이라고. . 비 마법사 집안에서 돌연변이로 태어난 물리 계열 마법사입니다.

성준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일어섰다. , 과일 좀 더 먹어. 어머니가 앉아 있으라 권했지만 숙제를 핑계로 방으로 돌아왔다. 성준은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가만히 침대에 누웠다. 갈 길이 멀었다. 분명 부모와 조부에게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계약은 불완전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같은 물리 계열 마법사여야 했는데, 정통 계열 마법사가 되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자신이 마법사인 거에 안도하고 기뻐하면서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계열의 마법사니까.

마법사가 되자 세상은 다른 곳이 되었다. 시야가 달라졌다. 눈치만으로 세상을 살피던 하성준에게 더 명확한 시선을 제공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색이 보였다. 각 물체 뒤에 도사린 마법이 보였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말하던 항마력 시스템이 구축된 방식이 보였다. 그건 마치 촘촘한 수세미처럼 얽어서 짜놓은 방패였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눈의 색이 왜 그전에는 전부 까만 색, 아니면 갈색이라고 생각했을까? 눈 안에는 수많은 색이 도사리고 있었다. 눈동자가 시뻘건 사람이 있기에 저도 모르게 한참을 바라보았는데, 지나가는 길에 붙은 전단지에 수배자로 이름이 오른 사람이었다. 정통 계열 마법사가 되자 수많은 귀신, 신수, 악마와 천사들이 인사를 건넸다. 당신이군요. , 당신이군요.

이렇게 변해버렸는데 어떻게 성준이 다른 이들과 섞여 살아갈 수 있었을까. 성준은 더욱 자만에 젖어 있었다. 자기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랬는데. 강해준이 나타났다.

한 눈에 알아봤다. 교육원에 끌려온 열다섯 살 강해준. 자기가 본 어떤 사람들보다 눈이 맑게 빛나고, 명확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마력은 명확한 만큼 차갑게 느껴지지만 성준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철이다. 불꽃으로 단련되는 철이다. 저 안에는 불꽃이 도사리고 있다. 그 불꽃에 눈을 빼앗겼다. 강해준은 자기가 원하던 모든 걸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 물리 계열 마법사에 최상급 마력. 그의 가슴 한 가운데 불꽃이 휘몰아치는 게 보인다. 장작으로 타는 불이 아니다. 대리석으로 된 신전 한 가운데 영원히 불타는 꽃이다. 사실은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물리적 마력. 성준은 그에게 눈과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고2까지의 생활은 그를 따라 다니는 생활이었다. 덤으로 끼인 김동식과 함께. 다른 남자들처럼 웃고 싸우고 까불고 욕하면서 생활했지만 사실 성준은 그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해준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 안에 도사린 불은 더 크고 밝게 빛났다. 자신의 마력량은 그대로인데. 불꽃 만이었다면 그렇게 사랑하게 되지 않았을 거다. 좋은 녀석이었다. 마법사들 특유의 오만도 없었고 막힌 구석도 없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만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갑자기 치러진 마법사 선발 전형에서 그에게 패배했다. 분했다. 그를 사랑하지만 그에게 이기지 못하는 건 뼈아팠다.

아버지와 조부, 어머니가 얼마나 실망하고 상심했던지. 자신은 다시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신라시대부터 마법사였던 이들의 상속자가 바로 1급 마법사가 되지 못했다고 괴로워했다. 자신을 질책했으나, 상대가 강해준인 걸 알고 그 질책마저도 금방 거두었다. 자신은 그게 제일 서러웠다. 강해준이 뭐기에. 자신은 그를 너무도 사랑하는데 그의 존재가 자신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가 있으면 자신은 부모와 조부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미래에 제일 소중한 걸 바치고 계약을 맺었는데. 그리고 진 것도 짜증났다.

어영부영 가야 할 대학에 들어갔다. 2급 국가마법사 자격으로 모든 시험이 프리패스였다. 마법대학 마법학부에 김동식과 강해준과 함께 입학했다. 그때부터 자기 안에 쌓여있던 모든 게 폭발했다. 사실 그때까지 하성준은 그림 같은 모범생이었다. 술도 담배도 해본 적 없고 지각도 안했고 이유 없는 결석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 야자를 째 본 적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 마셔본 술은 너무 좋았다. 맛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좋은 거였다. 강해준 같은 거였다. 차가운 거 같은데 마셔보면 뜨겁다.

강해준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아마도 이 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할 테지. 스무 살의 하성준은 용기가 없었다. 사랑하는데 보면 짜증나고, 제일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제일 큰 걸림돌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갓 대학 신입생이 된 하성준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뒤늦게 사춘기가 왔다. 강해준이 좋은데 그 강해준에게 진 게 억울해. 강해준 때문에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게 화가 나. 이 모든 게, 자기의 유치함이, 그 유치함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기에게 제일 짜증이 나.

폭발은 폭음이 되었다. 술을 그냥 거둬 마셨다. 어디든 끼어서 술을 마셔댔다. 좋은데 싫고, 싫은데 좋다. 너라서 좋은데 또 싫고, 싫은데 또 좋고. 옆에 있어서 좋은데 또 옆에 있어서 짜증나고. 그런데 또 다른 자리는 찾아가기 싫고. 김동식이랑 강해준 옆자리. 그냥 교육원때처럼, 마법고에서처럼, 그렇게 똘똘 뭉쳐서. 그렇게 매일매일 좋고도 싫은 마음을 부여잡고 뜨거운 걸 어떻게 뱉어낼 지도 몰라 술을 쳐 마셔댔다. 강해준 같은 술. 그냥 좋았다. 맛은 모른다. 마시는 법도 몰라. 그냥 좋아서. 차갑고 뜨겁고. 어지럽고. 너무 좋아서, 계속.

그러다가 그 술판들에서 빌어먹을 성준식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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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했었는데.

 

하성준은 자기 방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냥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렸지. 성준은 한숨을 푹 쉬었다. 눈을 감으면 옛날 일이 가끔 떠오르곤 했다. 지금도.

자신은 마법사가 존재하는 대한민국에서 마법사 명문가의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자신 대에는 여자 형제도 없이 무매독자였다. 아버지의 형제도 여동생 하나였고 할아버지는 통일 이전에는 형제가 전부 북한에 있었다. 역사에 남은 대마법사인 할아버지는 6.25 당시 북한에서 전향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전후에는 사업과 정치에 엄청난 수완을 보여 부와 권력을 동시에 쥐었다. 그가 키운 남매는 하나는 정치에 능한 대마법사가 되었고, 하나는 재계의 거물이 되었다. 자기 아버지가 전자였다.

그런 집안에 태어난 3대 독자. 그것도 외동아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생은 주변 어른들의 기대로 가득 찼다. 부와 권력이 모두 있는 집안, 그것도 태생적으로 타고 나야 하는 자격을 갖추고 있는 집안. 그들 세계에서 그들은 완벽한 귀족이었다. 귀족 가문의 상속자인 자신은 많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인생을 처음부터 맞이했다. 강대한 마력량. 정치력. 어딜 가나 뛰어난 인물이 될 것.

자신은 상속자였으나 동시에 이단이었다. 집안사람 모두가 물리 계열 마법사였다. 할아버지가 막대한 전공을 세웠던 건 온도에 대한 권능을 지니고 있어서였다. 아버지 역시 기상에 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경제 부흥 시기에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마법물리학 권위자로 마법대학 교수였다. 그 누구도 자신의 손자, 아들이 정통 계열 마법사일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어떤 물리적 마력이 발현될까 궁금해 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마력이 없었다.

자신은 대마법사의 손자이자 1급 마법사의 아들이었는데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열 살이 넘으면 마력이 발현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전전긍긍하며 성준의 마력이 발현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기대가 무너지자 교양 있는 집안이라 큰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인상을 쓰고 독한 외제 담배를 피웠고, 아버지는 매일 밤 독한 술을 마셨다. 마법대학 교수인 어머니는 매일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게 3대독자이자 무매독자이며 집안의 유일한 상속자인 자신이 물리 계열 마력이 나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험악해졌다. 곧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마법대학 교육원에 진학해야 하는데 마력이 나타나질 않으니 입학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성준의 부모는 중학교인 마법대학 교육원, 마법고등학교, 마법대학 동문이었다. 대한민국 마법사의 엘리트 코스를 그대로 밟은 부모 밑에서 평범한 아이가 태어난 거였다. 처음에는 믿고 기다려보자 하던 부모들도 점점 시간이 흐르며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정말 하성준은 평범한 아이였으니까. 마력을 감지하지도 못했다. 부모들은 자기가 낳은 아들이 평범하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백방으로 마력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결론은 하성준은 평범하다는 거였지만.

열 한 살의 하성준은 우울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였던 성준은 한숨을 쉬는 방법을 배웠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검은 트렌치코트만 입고 다녔다. 어린 나이에도 마음 한 구석이 타들어가는 걸 알았다. 자기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엄마, 아빠, 할아버지인데 그 셋이 자기 때문에 매일매일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싫었다.

어느 날이었을까. 성준은 메이드가 골라준 옷을 팽개치고 집을 나섰다. 등굣길이었다. 자신의 눈앞으로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나왔다.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부슬비를 맞으며 걸었다. 검은 바지, 셔츠, 구두와 버버리 키즈 트렌치코트. 엄마, 아빠는 자신이 검은 트렌치코트만 입고 다니자, 한숨을 쉬며 백화점에 데려가 검은 트렌치코트 세 벌을 더 사줬었다. 성준은 멍하니 걷는다. 부모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걸 안다. 그렇기에 자신이 마력이 없는 걸 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도.

어제 밤도 할아버지는 엄마의 작은 실수를 꼬투리 잡아 호통을 쳤고, 아빠는 거기에 맞서다가 할아버지와 싸웠다. 원래 할아버지는 엄마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자꾸 엄마를 혼냈다. 마력은 없지만 눈치는 빠른 성준은 그게 다 자신이 마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자기 때문이라는 걸.

반짝거리는 구두코에 빗물이 튀어 오른다. 성준은 그 물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며 걸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자기 시야에 날렵한 구두코가 들어온다. . 성준은 그 순간 멈춰 섰다. 고개를 숙인 그대로 오른쪽으로 한 발짝 움직여 다시 앞으로 가려고 하자, 날렵한 구두코의 남자가 말을 건다.

네가 하성준이냐.”

성준은 그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를 어떻게 알아. 성준은 고개를 들고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젊은 남자를 확인하고 바로 뒤돌아섰다. 부모님들이 누누이 가르쳤다. 누군가 자신을 아는 척 해도 넘어가지 말라고. 절대로. 납치당할 수 있다고. 산 사람 뿐만이 아니라고. 성준은 뒤돌아서서 뛰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의 한 마디가 성준의 뒷머리를 잡아챘다.

진짜 마력이 하나도 없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쯧쯔. 고생이 많구나.”

그 말에 성준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자는 성준의 뒷머리를 보며 계속 이야기한다.

아닌가. 당연한가. 자기 대에 다 몰아달라고 했으니 다음 대에 나누어줄 것이 없지. 어리석은 종자들이었구나. 그 여자가 택한 남자라 다를 줄 알았더니 그냥 평범하게 눈먼 인간이었을 뿐인가.”

성준이 뒤돌아선 채로 묻는다. 엄마가 그랬다. 귀신을 만나면 뒤돌아보지 말라고. 먼저 묻되 대답하지 말라고.

그거 누구 이야기야?”

남자는 고개를 돌린다. 두둑. 두둑. 뼈가 꺾이는 소리가 들린다. 성준은 마력은 하나도 없었지만 눈치는 빨랐다. 그게 자신의 마력인 것 같았다. 남자가 팔을 드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손마디를 꺾는다. 두둑. 두둑.

네 조부.”

성준은 가슴이 뛰었지만 티내지 않았다. 뒤돌아선 채로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정치와 금권이 넘쳐나는 집안에서 배운 건 정치질이었다. 티내지 않기. 함부로 웃거나 울지 않기.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가 가르친 것들. 남자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눈치가 빠른 새끼네. 너 새끼 마력 없는 대신에 눈치나 받았나 보지? 근데 마력이 없으니 뭐 파악이 안 될 텐데. 낄낄.”

남자의 검은 몸이 흔들린다.

마력과 금권, 권력이 있는 집안에 딱 하나 태어난 외동아들이 아무 마력도 없는 머저리라니 차라리 딸인 채로 태어나게 하라고 했거늘. 말을 꼭 안 들어서 이렇게 사단을 만들어.”

성준은 손이 덜덜 떨렸다. 자기가 태어날 때 어떤 일이 있었을지 알 수 있었다. 알라고 말한 거기도 하고. 자신은 원래 딸이었고, 아들로 태어나게 하는 대신에 마력이 없게 태어난 거겠지. 알 수 있다. 간단하다. 남자는 한참을 낄낄거리고 웃더니 뚝 그치고 한숨을 푹 쉰다.

그 분께서 이러지 말라 했으니.”

. 남자가 손가락으로 소리를 낸다. 성준의 몸이 빙글 돌아 남자와 마주본다. 성준은 당황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아까와는 달리 따뜻하게 웃었다.

이래봤자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나쁜 존재는 아니다.”

성준은 남자의 미소를 찬찬히 살폈다. 알 수가 없다. 자기 집에 드나드는 재벌, 정치인, 마법사들을 보았는데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남자는 하하, 하고 눈을 감고 웃다가 땅을 쳐다본다.

그 분이 너를 부탁하셔서, 너를 조금이나마 도우려고 왔다. 믿던지 믿지 않던지는 너의 몫이다. 갑자기 떨어진 호의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 배우며 살고 있지 않느냐.”

성준은 고개를 숙인 남자의 정수리를 바라본다. 까맣다. 전부 다. 눈에 보이는 걸로만 판단해야 하는데 다른 색채가 없어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든다. 수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보름달이 뜰 때에 나를 찾아와라. 원하면 찾아올 수 있을 거다.”

원하는 게 뭐지.”

그 말에 남자가 성준의 눈을 들여다본다. 성준 역시 그 눈을 들여다본다. 까만 하늘에 보름달이 빛나듯 반짝이는 눈동자. 하지만 자신이 되묻는 순간에 먹구름이 그 달을 가리듯 빛이 흐려진다.

너를 구해주려는 것이기는 하나.”

성준은 침을 삼킨다. 꿀꺽.

나는 대가 없이 움직일 수 없으므로 뭔가를 바라기는 해야겠지. 그 이야기는 보름달이 뜰 때 만나서 하자꾸나. 물론 네가 원해야 하는 거긴 하다만.”

남자는 두 손으로 짝, 하고 박수를 친다. 몸이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는다. 그 목소리는 성준의 머릿속에 울린다.

원하는 걸 이루어주마. 대가가 필요하겠지만. 보름달이 뜰 때에 만나자. 원하기만 하거라. 내가 찾아가마.”

 

집에 돌아온 성준은 가슴이 뛰었다. 나를 구해주겠다니. 어떻게? 기대하면 안 된다.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자신에 대해서건, 부모와 조부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건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마력이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한 기대도 깨졌는데 그 이외에 대해서 기대를 가질 수 있는가? 어린 나이에도 그건 알고 있었다.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걸. 하지만 가슴이 뛴다. . . 이상해.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눈매와 입매가 아직도 생각난다. 자기를 구해주겠다고 했다. 원하는 걸 이루어주겠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거? 나를 구해주는 거?

간단하다. 마력만 있으면 된다. 아니다. 강한 마력이 있어야 한다. 없는 것 보다야 있는 게 낫지만 강한 것이 좋다. 자신이 마력이 있으면 이 집이 평온해질 거다. 어머니가 울지 않고, 아버지가 한숨 쉬지 않고, 할아버지가 화내지 않을 거다. 자신이 마법사가 되면. 그들이 살아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자신도 그럼 이 집에서 인정받는 후계자가 될 수 있다. 그랬다. 자신은 인정받고 싶었다. 부모와 가족들에게.

자기가 마력이 없다고 판명된 후부터 세상은 달라졌다. 눈물과 탄식, 분노가 온 집안을 채웠다. 확정되기 전까지는 자신은 사랑받는 후계자였는데. 외동아들로 태어난 하성준은 문자 그대로 어렸을 때에는 땅도 밟아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안겨 있었으니까. 그랬는데, 마력 그 따위가 없다고 골방 도련님 취급을 받았다.

인정받고 싶다. 가족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강력한 마력을 가지고, 군림하고 싶다. 그래야 그들이 나를 인정해줄 테니까.

어린 나이? 이미 늙어버린 자신이 나이가 중요하진 않았다. 아무것도 모를, 아니 몰라야 할 나이에 세상의 일들을 알아버렸다. 정치를 배우고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하면 부모들조차 외면한다는 걸 배웠다.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어디든 똑같을 거다. 그렇게 하성준은 마력과 권력, 인정을 너무 어린 나이에 원하게 되었다.

 

성준은 그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걸 알았다. 마력은 없었어도 감은 있었다. 아니, 감도 없었지만 그냥 믿었다. 이유는 없었다. 믿을 이유도 없었고 전조도 없는데 그냥 그랬다.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다고 했다. 성준은 창 모서리에 걸린 보름달을 바라보다가 문을 닫고 뒤돌아섰다. 밤이다. 자기 발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안녕.”

그 남자가 서 있다. 성준은 놀라지 않았다. 반가웠다. 원하는 걸 가져다 줄 남자였다. 성준이 웃자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숨을 쉰다.

웃지 마.”
성준은 그래도 웃었다.

거 인생에 그게 뭐가 좋다고 웃느냐. 다 대가를 받아가는 일인데. 나중에 후회할 지도 모르고 말이야.”

웃는 얼굴을 구기지 않고, 더 활짝 웃으며 대답한다.

상관없어요. 왜 그렇게 말하죠? 당신이 악마일 수도 있고 날 죽일 수도 있겠지만, 필요한 것을 준다고 했잖아요. 이루어준다고. 소중한 걸 대가로 내놓는다고 해도, 어쨌든 필요한 소원 하나는 이루어주는 거잖아요.”

남자는 성준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숨을 푹 쉰다. 손을 저으며 고개를 숙인다. 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래. 네 뜻대로.”

성준은 눈을 빛냈다.

너에게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마력을 부여해주마. 그 정도는 쉽지. 아주. 너무 쉬운 일이야. 나에게는. 근데.”

따라붙는 말에도 성준은 계속 웃었다.

너에게 제일 소중한 걸 내놔야 해. 지금 가져가진 않아. 내게 지금 소중한 거 가져가봤자 채산이 안 맞아서 못 가져간다.”

언제 가져갈 건데요?”

남자는 성준의 대꾸에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말한다.

그건 안 가르쳐 준다. 꼬마. 니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안 가르쳐 줄 거야. 하여간 니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걸 가져갈 거다. 어느 시점이 될지는 모르지. 다만, 네 인생에 제일 정점인 시절에, 제일 중요한 걸 훅 가져갈 거야.”

그러세요.”

아니, .”

남자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우우.

도대체 왜 그러냐. 아무리 어리다지만. .”

상관없어요. 가져가세요.”

성준의 단호한 말투에 남자는 한숨을 다시 쉬더니 성준의 손을 잡았다. 아주 차가운 손. 성준은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준은 잠시 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손등에 남자가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입을 맞추고 얼마간 가만히 있더니.

어머니. 이 자에게 필요한 걸 내려 주십시오. 제가 요청합니다.”

손에 입술을 댄 채로 말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뭐야, 이렇게 싱겁게. 성준이 실망한 표정이 되자 남자는 입술을 떼어내고 웃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성준의 이마에 대고 말한다.

너와 나는 계약한 것이다. 나는 너에게 제일 필요한 걸 부여했다. 앞으로 너의 인생에 마력으로 인해 곤란을 겪을 일은 없으리라. 줄 수 있는 가장 강대한 마력을 주었다. 대신에, 나는 네 인생에 제일 소중하고 귀한 걸 가져가겠다. 기한은 따로 정하지 않았으나.”

남자가 성준의 눈을 들여다본다. 깊은 심연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성준은 그 눈동자에 홀린다. 아득한 우주, 넓고 넓은 밤하늘을 바라보는 듯이.

네 기나긴 인생에, 아주 멀지 않은 날에 가져가게 되리라.”

남자는 손을 떼고 뒤돌아섰다. 검은 등이 앞으로 걸어가다가 사라진다. 성준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갑자기 온 몸에 열이 펄펄 끓었다. 아파. 아파. 너무, 아파. 아악! 성준이 소리를 지르자 멀리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성준아! 하성준! 엄마, 너무 아파요. 성준은 비명을 질렀다. 그때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심각한 얼굴로 달려와 그를 바라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의사 불러! 어느 의사를 불러야 해요? 마법사 전담? 아니면, 그냥 의사? 둘 다 불러! 집사와 메이드들이 뛰쳐나가고, 가족들이 성준의 몸을 붙들고 흔들었다. 차가운 물수건을 얹고, 잠옷을 벗기고 마사지를 하고. 성준은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 안에 마력 코어가 생겨 있었다. 일주일 후에는 정통 계열 마법사, 그것도 국제마법사협회 기준으로는 상급 마법사에 달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성준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에게서 제일 소중한 걸 팔고 엄청난 마력을 받았다. 계약으로.

 

 

Posted by 이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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