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식은 일을 그만두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더 이상 공무원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만두는 건 쉽지 않았다. 우선 그만두겠다고 한 후에 몇 번이고 상급자들과 면담을 해야 했다. 면담 후에도 고집을 꺾지 않아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야 했고. 우리나라에 몇 없는 마법사 전문의. 그것도 공무원. 거의 유일한 존재였기에 그만두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아무리 놓치기 싫은 인력이라 해도 이런 일에서 제일 위에 있는 건 본인의 의지. 결국 준식은 모든 걸 두고 나올 수 있었다. 한 여섯 달 쯤 걸렸다.

그만두겠다고 이야기를 꺼내고 준비를 시작한 건 분명 두꺼운 패딩 점퍼를 벗지 못했던 늦겨울이었는데, 다 정리하고 자유의 몸이 되니 이제 다시 패딩을 슬슬 꺼내야 할 때가 되었다. 준식은 속으로 욕을 삼키면서 더 바쁘게 일했다.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사실 학교로 돌아가 포기한 학위를 다시 받고 싶다는 생각은 의사 면허를 받으면서 없어졌다. 의사 면허를 받고 나서 꿈이라고 해야 하나, 소망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생겼다.

- 이제 의사니까, 개원해야지.

의사니까 자기 병원을 차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왜 마법사 전문의가 되었는지는 잊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 쫓아다니면서 치료해주려고 그런 거였지. 곧 국가 소속 전문의가 되기 위한 전형도 치러야 하고, 그 전형에 통과하면 아마 오래도록 자신은 국가에 매여 노예처럼 부려질 터였다.

- 하지만 뭐, 언젠가는 은퇴할테고.

준식은 뭐든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언젠가는 전부 사라진다. 지금 자신이 염원하는 남자도, 그리고 그렇게 만든 그 마음도 사랑도. 사라진다. 전부. .

- 지금은 그 끝을 모르겠지만.

지금 같아선 끝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껏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몸이 따라가니 끝이 어딘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끔, 공부도 일도 전부 없고 겨우 틈이 생겨날 때. 몸도 마음도 아주 가끔 한가할 때. 미래를 생각해보게 되는 멍한 시간에. 그때 준식은 자신이 은퇴한 후에 시간을 그려보았다.

- 주택에 병원을 차리는 거지.

국가 소속 마법사 전문의로 일하다가 퇴직하고 나오면, 어차피 응급환자는 없을 테고 환자는 어떻게든 찾아오게 된다. 이동에 제약이 없는 이들이 자기 환자들이니까. 준식은 깍쟁이같은 얼굴에, 사상을 가졌으면서 취향은 호젓하고 시골스러웠다. 조용한 게 좋았다. 그리고 커피를 좋아했다. 대학원에 다닐 당시에 가지게 된 취미였다. 인생의 모든 시간을 공부에 때려붓던 시절, 잠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탐닉했던 커피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렸다.

- 커피도 개원도 함께 할 방법이 없나.

가끔 머리도 손도 빌 때가 있다. 그럴 땐 빌어먹을 하성준을 생각했다. 게이면서 왜 자꾸 아닌 척 하고 결혼해서 정치인 하려고 해. 왜 자꾸 줄 빌려줄 데도 아닌 데 가서 줄 대려고 해. 몇 번이나 욕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자동문이 열린다. 준식은 싱크대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 하성준놈. 그놈이 왔다. 준식은 고개를 젓고 행주를 걸이에 걸고서 카운터에 섰다. 성준은 보기보다 입맛이 까다로웠다. 도련님이었으니까. 생긴 건 맨날 국밥에 찌개, 삼겹살에 소주만 퍼먹게 생겨서는 아니 실제로도 좀 그러면서 커피 맛은 이상하게도 따져댔다. 하도 잔소리를 해서 성준에게만 따로 먹이는 핸드드립 블랜딩을 따로 만들어뒀을 정도였다.

.”

번듯하고 멀쑥하게 수트를 차려 입고 서서는 말을 건다. 준식은 훅 째려보았다. , 가 뭐냐. 이 새끼가. 보자마자 안 고운 말부터 썼다가는 오늘도 서로 끝이 없으리란 걸 안다. 그래서 자기는 말을 곱게 하기로 했다.

. 왔냐. 뭐 마실래. 밥은 먹었어?”

한국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정다운 인사를 건넨다. 어제도 하루 종일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그래도 우선 씹어 삼키고 말을 한다. 오늘은 우선 그러기로 한다.

. 밥 먹었고. 나 그냥 커피 한 잔 줘.”

이놈의 커피는 자신이 만든 핸드드립 블랜드. 온도는 83도로. 준식은 한숨을 작게 쉬고 물을 준비하고 드리퍼를 꺼내 온다. 제일 정성스레 만드는 하성준 블랜드를 찾아온다. 바로 핸드밀로 갈아서 원두를 준비한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기분이다. 성준은 그 양을 바라보다가 창가 어느 구석에 가서 등을 기대고 앉는다. 그러고는 다리를 쭉 뻗고 다른 다리를 무릎 위에 올리고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보기 시작한다.

준식은 개원도 카페도 같이 하기로 했다. 전쟁 이전에도 많던 기관들이었다. 휴게음식점과 의료기관을 함께 겸하려니 얼마나 일이 복잡하던지 머리가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구상부터 시작해 전부 난관이었다. 주택가가 많은 어느 부촌 한 군데에 집을 샀다. 공무원 관두고 개원과 개업에만 매달렸다. 집을 개조하고, 로스팅 기계를 들이고,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이고, 의료기구와 용구를 사고, 간호사를 구인하고, 카페 바리스타를 끌어오고. 원두들을 로스팅하고, 하성준 핸드드립 블렌드를 만들고.

네 감은 눈 위에 꽃잎이 내려앉으면

네 눈 속에 꽃이 피어난다.

 

좀 정리되자 준식은 바로 꽃시장으로 달려가 꽃과 나무들을 사왔다. 카페이자 병원인 곳에는 꽃이 있어야 했다. 마법사들은 예민한 종자들이라, 식물과 동물에 관대하다. 그것들을 보고 마음의 안식과 위안을 얻는다. 전혀 안 그래 보이는 하성준조차 나무에 말을 걸고, 새를 사랑하며 그들과 일한다.

마당에 성준을 위한 모란과 붓꽃, 수국과 소나무, 생각보다 자주 찾아오는 강해준과 그 마누라, 그 딸을 위해서 은행나무와 산수유를 심었다. 여름에 너무 파랗기만 하기에 배롱나무도 심고, 날카로운 맛이 하나도 없기에 상사화도 심었다. 덕분에 사시사철 알록달록했다. 창밖을 보면 내내 하얗고 파랗고 노랗고. 준식은 매일같이 찾아올 성준의 눈을 위해서 최대한 화려하게 마당을 꾸몄다.

네 감은 눈 위에 햇살이 내리면

네 눈 속에 단풍나무 푸른 잎사귀들이 살랑거린다.

꽃무덤을 보고 자는 척 고요히 꽃과 대화하는 너를 위해서. 내가 일하느라 바쁠 때 심심하지 말라고, 내 시간을 들여 정원을 꾸몄다. 내 병원에 치료받으러 와서 목마르거나 배고프지 말라고 카페를 차렸다.

 

네 감은 눈 위에 나비가 앉으면

네 눈동자는 환하게 빛나고 있을까.

 

그걸 네가 지금 좋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나는 너에게 있어 끝까지 약자일 예정이기에 너를 위해 많은 걸 준비했다. 드리퍼에 담은 원두 위로 조심히 물을 흘려넣는다. 원두가 조금씩 부풀어오르며 드리퍼 밑의 서버로 검은 물을 쏟아낸다. 향긋한 커피향이 온 홀에 퍼져나간다. 준식은 커피를 다 내려 제일 좋은 잔과 서버에 담아내고 성준을 바라본다. 어느새 눈을 감고 배에 두 손을 얹고 앉아 있다.

 

먼 항해에서 돌아온 배의 노처럼

네 긴 속눈썹은 가지런히 쉬고 있다.

가끔씩 배가 출렁이는지

넌 가끔 두 주먹을 꼭 쥐기도 한다.

 

준식은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본다. 눈밑이 푹 꺼져 있다. 약간 부은 것 같기도 하다. 어제도 술 마셨나. 성준은 바빴다. 일련의 사건 이후 성준은 커밍아웃하고 당적을 옮겼다. 좌파 계열 당에서 받아준 게 다행이었다. 남자가 좋다는 것 이외에는 온전히 극우의 자랑스런 아들로 모든 스펙을 가지고 있던 젊은 남자 마법사 정치인을 버리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 이후 성준의 인생은 당적만 바뀌었을 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활동에 불려 다니고, 1급 마법사로서 소화해야 하는 일들을 하고. 가끔 해외로 출장을 나가고. 아주 가끔 다쳐서 와서는 자신이 죽어라 욕을 하며 치료해주고.

그가 커밍아웃하면서도 준식 자신은 전혀 노출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는 사람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알 만한 사람은 알지만 굳이 누구도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관계. 준식은 처음에는 자신이 그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아 서운했다. 그러나 성준이 다시 극우당에 소속되어 있을 때처럼 다니는 걸 보고 그 마음을 바로 접었다. 귀찮은 건 질색이었고, 자신의 고객들은 조용한 걸 좋아했으니까. 자신조차. 그 서운한 마음조차 지나가자 자신은 당연하게, , 하성준 걱정을 했다. 너무 일이 많았으니까.

 

네 감은 눈 속에 눈이 내리면

나는 새하얀 자작나무숲을 한없이 헤매고 있을 거야.

지친 발걸음이 네 눈동자 위에 찍힌다.

 

성준이 눈을 떴다. 둘이 눈이 마주치자 준식은 그 앞에 쿠키 하나와 방금 내린 커피를 내려놓는다. 성준은 기지개를 켜며 길게 하품을 하고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천천히 마신다. 산적같은 얼굴과 몸에 어울리지 않는 기품과 자세, 예의. 이 역시 성준을 이루는 한 부분이었다. 극우의 자랑스런 아들이었다가, 좌파의 선구자가 된 남자. 반대의 영역으로 넘어와도 맨 앞으로 앞서나가는 남자.

어제도 술 마셨냐.”

.”

그런 놈이 또 커피를 처 마시냐.”

이걸 먹어야 해장이 되더라고.”

작작 드세요.”

니가 커피를 내리는데 내가 작작 마실 수가 있을 리가.”

.”

오늘은 뭔가 다르다. 말이 이상해. 이런 말 안 하는 놈인데. 준식은 고개를 갸웃한다. 이 자식 뭔가 잘못 먹었나. 성준은 다시 눈을 감고 한숨을 쉰다.

 

성준식.”

.”

결혼하자.”

 

네가 눈을 뜨면 내 눈은 까맣게 감기고 말 거야.

 

어느새 성준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 남은 한 손으로 반지를 꺼낸다. 케이스도 없어. 그냥 누런 순금 반지. 딱 보기만 해도 알겠다. 그냥 24K 민짜 반지구만. 아무 것도 없이, 그냥. 네모난 반지다.

아무것도 없는 거 같지. 아니야.”

반지 안을 보여준다.

네 이름이랑 내 이름을 새겼어.”

. 준식은 기가 막혀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없을 진지한 얼굴이다.

그리고 이거 디올 파인 주얼리 오더 메이드야. 받아주는 브랜드가 없어서 부띠끄 몇 개를 돌았는 줄 아냐. 매니저가 웃음을 겨우 참으면서 받아주더라.”

나라도 웃겼겠다.

아직 뭐, 입법은 안 되었고. 강해준처럼 초법적 수단을 써서 널 가족관계증명서 안에 처넣을 순 없겠지만.”

성준이 준식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그 무식하게 생긴 반지를 끼운다. 싯누런색에 광택만 있지, 그냥 네모각진 민짜 순금 반지. 이게 무슨 디올 파인 주얼리 커스텀 메이드라는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결혼해. 결혼반지야.”

준식은 홀린 듯이 그 반지를 바라본다. 아니 이건 무슨 일. 이건 무슨 반지.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디올 파인 주얼리라고. 아니 이게 뭐. 아니. 아니.

사랑한다.”

그 말에 고개를 숙인 건 성준이 아니라 준식이었다. 성준이 극우정당을 버리고 좌파로 이적하게 되었던 계기가 되었던 자신의 말. 넌 왜 나한테 결혼하자고 안 하냐. 이 시발새끼야. 그 비슷한 말이었던 거 같다. 하여간. 그 말이 돌고 돌아, 맨 마지막에는.

평생 같이 있어 봅시다.”

 

나는 너를 채우고 너는 내게서 빠져나간다.

우리는 번지면서 점점 뚜렷해진다.

 

* 신철규 - 데칼코마니  

Posted by 이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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