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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없던 힘이 생긴 초등학생은 신이 났다. 아무리 눈치가 빠른 애늙은이라고 할지라도 어린이였다. 정통 계열 마법사라는 게 판정되고 난 이후의 하성준은 급격히 기고만장해졌다. 계약이고 자시고 원래 자기가 가진 힘 같았다. 내꺼야! 이제 내거라고!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었으니까. 어머니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채로 갑자기 성준을 데리고 이런저런 모임과 백화점 명품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성준은 어머니가 화려한 옷을 좋아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숨을 그만 쉬었다. 제일 극적으로 변한 건 할아버지였다. 자신이 마력이 없는 줄 알았을 때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예전과 같은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성준은 빠르게 그 상황에 적응했다. 원래 그랬던 양 살기 시작했다. 정통 계열 마법사로 판정되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에 마법교육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아마 할아버지와 부모님들처럼 마법고, 마법대학을 다니다 군대 갔다 와서 마법사 선발 시험을 치르고 국가마법사가 되겠지. 그리고 다음에는 역시 아버지나 할아버지처럼 권력을 쥐고 휘두르며 살게 되지 않을까. 갑자기 인생이 명확해졌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던 인생에서, 모든 게 준비되어 말처럼 앞만 보고 달려 나가면 되는 인생이 되었다. 찌질이에서 왕자님이 되어버린 거지.

그래서 성준은 그 인생을 마구 달렸다. 목에 우선 힘이 들어갔다. 빳빳하게. 부모와 조부의 희망이자 자랑이 되어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교육원에 들어간 순간부터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 되었다. 조부와 부모, 고모까지 모든 집안 식구들의 후광이 엄청났던 데다가, 자신도 그 마력이 대단했던 덕분이었다. 물론 그건 강해준이 나타나면서 깨졌지만.

강해준. 강철에 대한 권능을 가진 자. 판정자들이 기겁하고 전 연구원들이 달려 나가 서로 논문 케이스로 삼겠다고 난리를 쳤다는 인간. 자기와 동갑, 남자. 국가마법사들 내에서도 파문이 일었다. 보고된 마력량이 이때까지 알고 있던 마법사들 중에 최상급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부모와 조부도 모여서 그에 대해 말했었다. 그 정도 수치면 대단한 건데. 대단한 정도가 아니에요. 국제마법사협회 기준 최상급 마법사 정도에 속합니다. 강철에 대한 권능이라고. . 비 마법사 집안에서 돌연변이로 태어난 물리 계열 마법사입니다.

성준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일어섰다. , 과일 좀 더 먹어. 어머니가 앉아 있으라 권했지만 숙제를 핑계로 방으로 돌아왔다. 성준은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가만히 침대에 누웠다. 갈 길이 멀었다. 분명 부모와 조부에게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계약은 불완전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같은 물리 계열 마법사여야 했는데, 정통 계열 마법사가 되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자신이 마법사인 거에 안도하고 기뻐하면서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계열의 마법사니까.

마법사가 되자 세상은 다른 곳이 되었다. 시야가 달라졌다. 눈치만으로 세상을 살피던 하성준에게 더 명확한 시선을 제공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색이 보였다. 각 물체 뒤에 도사린 마법이 보였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말하던 항마력 시스템이 구축된 방식이 보였다. 그건 마치 촘촘한 수세미처럼 얽어서 짜놓은 방패였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눈의 색이 왜 그전에는 전부 까만 색, 아니면 갈색이라고 생각했을까? 눈 안에는 수많은 색이 도사리고 있었다. 눈동자가 시뻘건 사람이 있기에 저도 모르게 한참을 바라보았는데, 지나가는 길에 붙은 전단지에 수배자로 이름이 오른 사람이었다. 정통 계열 마법사가 되자 수많은 귀신, 신수, 악마와 천사들이 인사를 건넸다. 당신이군요. , 당신이군요.

이렇게 변해버렸는데 어떻게 성준이 다른 이들과 섞여 살아갈 수 있었을까. 성준은 더욱 자만에 젖어 있었다. 자기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랬는데. 강해준이 나타났다.

한 눈에 알아봤다. 교육원에 끌려온 열다섯 살 강해준. 자기가 본 어떤 사람들보다 눈이 맑게 빛나고, 명확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마력은 명확한 만큼 차갑게 느껴지지만 성준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철이다. 불꽃으로 단련되는 철이다. 저 안에는 불꽃이 도사리고 있다. 그 불꽃에 눈을 빼앗겼다. 강해준은 자기가 원하던 모든 걸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 물리 계열 마법사에 최상급 마력. 그의 가슴 한 가운데 불꽃이 휘몰아치는 게 보인다. 장작으로 타는 불이 아니다. 대리석으로 된 신전 한 가운데 영원히 불타는 꽃이다. 사실은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물리적 마력. 성준은 그에게 눈과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고2까지의 생활은 그를 따라 다니는 생활이었다. 덤으로 끼인 김동식과 함께. 다른 남자들처럼 웃고 싸우고 까불고 욕하면서 생활했지만 사실 성준은 그를 보면 가슴이 뛰었다. 해준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 안에 도사린 불은 더 크고 밝게 빛났다. 자신의 마력량은 그대로인데. 불꽃 만이었다면 그렇게 사랑하게 되지 않았을 거다. 좋은 녀석이었다. 마법사들 특유의 오만도 없었고 막힌 구석도 없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만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갑자기 치러진 마법사 선발 전형에서 그에게 패배했다. 분했다. 그를 사랑하지만 그에게 이기지 못하는 건 뼈아팠다.

아버지와 조부, 어머니가 얼마나 실망하고 상심했던지. 자신은 다시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신라시대부터 마법사였던 이들의 상속자가 바로 1급 마법사가 되지 못했다고 괴로워했다. 자신을 질책했으나, 상대가 강해준인 걸 알고 그 질책마저도 금방 거두었다. 자신은 그게 제일 서러웠다. 강해준이 뭐기에. 자신은 그를 너무도 사랑하는데 그의 존재가 자신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가 있으면 자신은 부모와 조부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미래에 제일 소중한 걸 바치고 계약을 맺었는데. 그리고 진 것도 짜증났다.

어영부영 가야 할 대학에 들어갔다. 2급 국가마법사 자격으로 모든 시험이 프리패스였다. 마법대학 마법학부에 김동식과 강해준과 함께 입학했다. 그때부터 자기 안에 쌓여있던 모든 게 폭발했다. 사실 그때까지 하성준은 그림 같은 모범생이었다. 술도 담배도 해본 적 없고 지각도 안했고 이유 없는 결석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 야자를 째 본 적도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 마셔본 술은 너무 좋았다. 맛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좋은 거였다. 강해준 같은 거였다. 차가운 거 같은데 마셔보면 뜨겁다.

강해준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아마도 이 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할 테지. 스무 살의 하성준은 용기가 없었다. 사랑하는데 보면 짜증나고, 제일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제일 큰 걸림돌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갓 대학 신입생이 된 하성준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뒤늦게 사춘기가 왔다. 강해준이 좋은데 그 강해준에게 진 게 억울해. 강해준 때문에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게 화가 나. 이 모든 게, 자기의 유치함이, 그 유치함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기에게 제일 짜증이 나.

폭발은 폭음이 되었다. 술을 그냥 거둬 마셨다. 어디든 끼어서 술을 마셔댔다. 좋은데 싫고, 싫은데 좋다. 너라서 좋은데 또 싫고, 싫은데 또 좋고. 옆에 있어서 좋은데 또 옆에 있어서 짜증나고. 그런데 또 다른 자리는 찾아가기 싫고. 김동식이랑 강해준 옆자리. 그냥 교육원때처럼, 마법고에서처럼, 그렇게 똘똘 뭉쳐서. 그렇게 매일매일 좋고도 싫은 마음을 부여잡고 뜨거운 걸 어떻게 뱉어낼 지도 몰라 술을 쳐 마셔댔다. 강해준 같은 술. 그냥 좋았다. 맛은 모른다. 마시는 법도 몰라. 그냥 좋아서. 차갑고 뜨겁고. 어지럽고. 너무 좋아서, 계속.

그러다가 그 술판들에서 빌어먹을 성준식을 만났다

Posted by 이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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